영화 ‘왕과 사는 남자’ 의 세조는 왜 전씨 조상님한테 1등 공신을?


title: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의 세조는 왜 전씨 조상님한테 1등 공신을?”
date: 2026-03-13
category: “중년의 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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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전전씨 > 천안전씨 > 삼재공파 후손이며

전씨 족보에 나온 조상님을

찾아 보다가 적어 봤습니다.

조선 시대에 쓰인 대동보 서두에도 나오듯이

온전전씨는 모두 한 핏줄에서 나온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어려우면 서로 돕고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선조가 내린 유산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 혼란과 검증의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

어느 파인지는 구분하지 않았으며

최대한 전씨로 통일했습니다.

아래 내용에는 역사적 기록과 해석에는

썰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를 포함 요즘 사람은 한자 많고

재미없으면 전혀 읽지 않습니다.

전씨의 2000년이 넘는 생존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전씨 후손들이 알았으면 하는 생각에

나름 재미있게 작성했습니다.

역사의 중심, 전씨 가문의 두 갈래 길

조선을 움직인 전씨 가문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었습니다.

권력의 중심에서 국가의 기틀을 다진

전씨 세력은 실용적 선택이 있었고,

흔들리지 않는 명분으로 도덕을 세운 전씨의 절개가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역사적 선택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조선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기록해보겠습니다.

제1부. 백제 본토 온전전씨의 여정

우리 전씨 가문의 뿌리는 백제에 있습니다.

인터넷에 널리 알려진 환성군 전섭 시조 부터,

백제 다루왕 때 재상의 아들이 한나라에 표기 대장군으로 건너갔고,

훗날 통일신라 때 당나라에서 돌아왔습니다.

백제는 660년 당나라의 침략으로 망했습니다.

하지만 백제 본토의 전씨 세력은 673년까지 백제 부흥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충성심의 상징이었습니다.

계유명 전씨 불비상 국보 제106호

백제 왕과 고관대작들을 위해 절과

불비상으로 발원했던

기록이 비문에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4월 초파일입니다.

4월 초파일

비암사라는 절에서는 백제 영락대전

행사를 지금도 거행하고 있습니다.

전씨가 지키려고 했던

백제의 유산이

1300년이 지난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그 이후 고려 개국공신을 거쳐

고려 말기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성공 시킨 후

40년이 지난 후

단종의 유배 영화는 시작합니다.

제1-2부. 전순의와 수양대군,

그리고 한명회의 결탁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비극적인

폐위와 세조(수양대군)의 찬탈 과정(계유정난)에는

한명회라는 걸출한 기획자와

더불어 어의 전순의(천안 전씨)라는

내부의 핵심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궁궐 내부의 정보망

문종의 종기 치료를 담당하던

최고 어의 전순의는

임금의 병세를 수양대군에게

은밀히 알려 거사의 타이밍을 잡게 했습니다.

단종 즉위 후에도

그는 수양대군의 귀와 눈이 되어

권력 찬탈의 결정적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한명회와의 운명적 파트너십

한명회가 밖에서 무력과 전략을 통솔했다면,

전순의는 안에서 궁궐의 동향을 통제했습니다.

한명회가 훗날 천안 수신면에 묘소를 쓴 것도,

바로 옆 성남면 일대에 강력한 토착 기반을

두고 있던 동지 전순의 가문과의

끈끈한 연대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제2부. 계유정난 이전, 천안 전씨의 위상

고려 멸망 후 전씨는

이미 새로운 시대에 적응했습니다.

그들은 실천과 현실을 중시했습니다.

백제 멸망 후부터

천안 본토에 기반을 두었던 전씨들은

역사의 변화 속에서 생존과 번영을 택했습니다.

당장의 명분보다 국가 운영의 현실성을 중시하는 가문의 기질이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이 훗날 조선 초기

훈구파의 중심이 되는

정신적 뿌리가 되었습니다.

제3부. 고려의 두 전씨와 그 선택

시간이 흘러 고려 시대가 되었습니다.

중원에 있던

온전전씨 세력과 통일신라 때

당나라 공주 배임으로 온

정선전씨가 친척 관계로 뭉쳐 살았습니다.

정선전씨, ‘불사이군’의 길을 걷다

고려 개국 때의 일입니다.

왕건이 궁예의 부장군으로 있을 때,

정선전씨의 한 인물이

왕건을 형처럼 따랐습니다.

그리고 왕건과 함께 대진국 궁예를 무너뜨렸습니다.

이것이 정선전씨가

고려 개국공신이 된 진정한 이유였습니다.

시간이 다시 흘러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이것이 정선전씨의

가문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불사이군, 不事二君)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키기 위해 관직을 버렸습니다.

개성의 두문동을 거쳐 고향인

정선으로 내려갔습니다.

정선의 깊은 산중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모두 시를 지었습니다.

망국의 한을 달래는 시였습니다.

그 시의 대표적인 가사가 지금의 정선아리랑입니다.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만수산의 검은 구름 = 이성계 세력의 부상)

이 가락이 오늘날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후손들에게는 이 노래가 단순한 민요가 아닙니다.

가문의 뼈아픈 충절이 담긴 ‘충의 노래’입니다.

거칠현 7현: 함께 절개를 지킨 선비들

정선군 남면에 ‘거칠현동’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일곱 명의 현인이 거주했다’는 뜻입니다.

그 중심에 전오륜(全五倫)이(정몽주의 직계제자) 있었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 집현전 대제학이었던 그였습니다.

이름 역할 및 특징
전오륜 정선전씨. 대제학 역임. 거칠현 7현의 중심
6명의 현인들 전오륜과 뜻을 같이하여 초근목피로 절개를 지킴

매달 초하루와 보름이면 무엇을 했을까요?

고려의 관복을 갖춰 입었습니다.

산에 올라 옛 수도인 개성을 바라보며 통곡했습니다.

이것이 정선전씨의 역사였습니다.

제4부. 조선 개국과 전씨의 선택

그러나 같은 전씨 가문이라도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정선전씨가 고려에 대한 충절을 택했다면,

다른 전씨는 새로운 국가를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실용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백제 멸망 후부터 673년까지

전씨들은 항상 새로운 시대에 적응했습니다.

그들은 실천과 현실을 중시했습니다.

제5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시대

1453년 10월, 한양의 야밤입니다.

조선의 권력 지형이 순식간에 변했습니다.

이것을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합니다.

수양대군(뒷날의 세조)의 쿠데타였습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이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 있습니다.

제6부. 전씨가 벌인 역사의 쿠데타

세조 1년(1455년),

세조 원종공신(世祖 原從功臣)

명단이 발표됩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계유정난 등)에

기여했거나, 왕실의 친인척 및 소임을 다한

관료들을 포상하기 위해 기록된 영광의 명부입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ga_10112027_003

여기에 참여한 전씨 명단이 나옵니다.

1등 공신 2명

1. 전순의 (全循義)

왕의 생명을 지키는 최측근 참모

직급: 상호군 (정3품)

세종부터 세조까지 모신 어의(御醫)입니다.

당대 최고의 의학자였습니다.

1등 공신에 오른 이유는?

거사 과정에서 세조의 안위를 돌보고

궁궐 내부의 은밀한 움직임을 조율했기 때문입니다.

‘전략적 힐러’이자 핵심 고문이었습니다.

현대적으로는 대통령 주치의 겸

청와대 수석 비서관 수준의 위상입니다.

2. 전광의 (全光義)

도성을 장악한 무력의 상징

직급: 상호군 (정3품)

전순의 조상님과 같은 상호군입니다.

하지만 전광의 조상님은 실질적인 무력 지휘권을 상징합니다.

1등 공신 명단에서 고위 무관들과 함께 나열되었습니다.

정난 당시 수도 방위의 핵심 부대를 움직여 반대 세력을 제압했습니다.

‘강력한 야전 사령관’이었습니다.

현대적으로는 수도방위사령부 부사령관이나 참모장(장성급) 에 해당합니다.

2등 공신: 거사를 성공시킨 정예 현장 지휘관

3. 전녕수 (全寧壽)

궁궐 방어의 허리

직급: 사직 (정5품)

오늘날 기준으로는 수방사 핵심 대대장 (중령급)입니다.

사직은 오위의 실제 작전 단위인 ‘부(部)’를 통솔하는 직책입니다.

궁궐의 특정 구역을 완전히 통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4. 전자완 (全自完)

행동으로 입증한 현장 사령관

직급: 행사정 (정7품)

질문자님의 직계 조상님입니다!

‘행(行)’이 붙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입니다.

계급은 낮아도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높은 임무를 수행했다는 뜻입니다.

특수 임무 지휘관‘이었습니다.

현대적으로 대통령 경호처의 정예 중대장(대위급) 수준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작전 전체의 선봉에 서서

성문을 열거나 핵심 인물을 호위한 실전 영웅입니다.

5. 전계원 (全繼元)

6. 전유선 (全有先)

최일선 정예 장교

직급: 사용 (정9품)

현대적으로 수방사/경호처 소속 초급 장교(소위급) 입니다.

일반 군인이 아닙니다.

왕의 곁에서 칼을 뽑을 수 있는 허가받은 엘리트 요원들입니다.

7. 전을생 (全乙生)

8. 전수 (全守)

거사의 막내 장교

직급: 진의부위 (종9품)

장교 품계 중 가장 낮습니다.

하지만 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거사 당일 밤 직접 몸을 던져 공을 세운

정예 결사대 요원 임을 말해줍니다.

3등 공신: 전략 행정 및 특수 지원 그룹

9. 전사용 (全司勇)

부대 관리의 명수

직급: 사직 (정5품)

2등 공신의 전녕수 조상님과 같은 위상입니다.

중령급 (대대장) 수준입니다.

군 조직의 안정과 사후 처리를 담당한

베테랑 관리직입니다.

10. 전남보 (全南寶)

군사 행정의 브레인

직급: 선무랑 (종6품)

이분은 문관 품계입니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국방부 전략기획관이나 청와대 안보실 행정관 급입니다.

칼보다는 붓과 머리로 거사 후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군수 물자를 보급한 전략가입니다.

11. 전유례 (全有禮)

중간 실무 장교

직급: 사정 (정7품)

중위~대위급 실무자입니다.

부대 운영과 연락을 담당한 중견 간부입니다.

12. 전진목 (全進穆)

거사를 보좌한 장교

직급: 사용 (정9품)

초급 장교입니다.

현장에서 상부의 명령을 완벽히 수행한

실무 요원입니다.

13. 전유손 (全有孫)

정밀 작전의 열쇠

직급: 행장루 (기술직)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군사 작전의 기본입니다.

현대적으로 국방정보본부나 정밀 기술 부대의 요원 입니다.

작전의 ‘타이밍‘을 맞춘 핵심 기술 전문가입니다.

14. 전실 (全實)

15. 전본 (全本)

가문을 지킨 청년 인재

직급: 학생 (관직 없음)

하지만 학식이 높은 가문의 인재들입니다.

현대적으로 미래의 고위 공무원이나 장교 후보생 입니다.

가문의 명운을 걸고 거사에 참여하여

충성심을 인정받은 영예로운 청년들입니다.

정난원종공신 15명의 의미

조직의 완성도

전씨는 계유정난 때

국가 최고 수준의 작전에서

최상층 (1등 공신)부터 최하층 (3등 공신)까지

계층에서 역할을 했습니다.

가문의 위상

단순히 무력만으로 거사를 성공시킨 것이 아니라

의료, 행정, 전략, 기술, 인재까지 모든 분야에서

종합적인 국가 운영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역사적 의의

이것이 바로 전씨가 조선 초기를 지배한

훈구파‘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8-1. 조직 분석: 수도 방위 엘리트 조직의 위계

이 명단을 자세히 분석하면

전씨 세력(全氏 가문)의 정체가 명확해집니다.

단순히 ‘정난에 참여한

무공 집단’이 아니라

임금을 지키는 수도 방위 엘리트 조직으로 기능했다는 해석이 충분히 타당합니다.

관직 체계: 오위(五衛)의 일관된 구조

대부분의 전씨 후손들이

‘오위(五衛)’ 소속 군직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호군, 사직, 행사정, 사용 등

모두 도성 방어 및 궁궐 수비 담당 부대의

관직 체계였습니다.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천안 전씨 가문이 수도 방위 조직 안에

깊이 뿌리내렸다는 증거입니다.

공신의 위상: 궁 안팎의 양분 지배

더욱 흥미로운 점은 1등 공신 2명의

역할 분담입니다.

전순의: 어의(御醫) + 상호군 → 궁궐 내부의 핵심

전광의: 상호군 → 도성 무력의 통제

즉, 한 가문이 궁 안팎의 방위를

양분하여 지배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 위상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임금을 만들 수 있는

모든 길목을 장악했다는 뜻입니다.

관계의 연속성: 위계적 역할 분담

이후 명단에 드는

전녕수, 전자완, 전유선 등 모든 인물들이

하위 부대의 지휘관 내지

현장 핵심급으로 보입니다.

가문 전체가 수도 방위 조직 안에서

위계적 역할 분담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일관됩니다.

최상층(1등 공신): 전순의(궁내), 전광의(궁외)

중간층(2등 공신): 전자완, 전계원, 전유선 등 각 부서 실무 지휘관

기층(3등 공신): 전실, 전본, 전진목 등 기층 인력

이것은 조직도입니다.

군사 쿠데타의 계획이 이렇게 체계적으로

조직된 것은 드뭅니다.

조직적 특징: 오위의 내위·외위 구조

오위(五衛)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습니다.

내위(中衛·金衛):

임금을 직접 호위하는 부대

외위(忠武衛·御營衛 등):

도성 전체를 방위하는 부대

명단에서 보이는

전씨 인물들의 역할과 품계가

이 구도에 맞게 배열되어 있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천안 전씨는 의도적으로

수도 방위 체계의

핵심 자리들을 차지했습니다.

9. 공신 책봉과 가문의 특권

이 모든 역할이 세조의 눈에 띄었습니다.

세조는 천안전씨 가문에

파격적인 보상을 내렸습니다.

그들을 조선 제일의 훈구파(기득권 세력)로 만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받았을까요?

막대한 토지와 노비였습니다.

전순의는 좌익공신 3등에 책봉되었습니다.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15명의 가문 사람들은 정난원종공신에 대거

이름을 올렸습니다.

수십 결의 공신전(토지)과 노비가 하사되었습니다.

천안·목천 일대의 거대 지주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특권도 있었습니다.

‘불사(不死)’의 면죄부였습니다.

공신 명단에 오르면 반역을 제외한 웬만한 죄로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대간들의 격렬한 탄핵 속에서도

전순의가 천수를 누린 이유였습니다.

이것이 정치적 세력화였습니다.

제7부. 전순의, 시대를 앞서간 과학의 선구자

하지만 전순의의 진정한 위대함은

정치적 성공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국 의학과 과학사에 지워지지 않을

거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단순한 어의가 아니었습니다.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한 실학의 선구자였습니다.

1. 의방유취(醫方類聚): 동양 의학의 백과사전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그는

365권 규모의 거대 저술을 시작했습니다.

당대 동양 의학의 모든 지식을 집대성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의학서였습니다.

조선 의학의 수준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린 업적입니다.

오늘날까지 인류의 의학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 산가요록(山家要錄): 세계 최초의 온실 기술

농서이자 요리책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획기적인 부분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이 책에 기록된 ‘동온실(冬溫室)’ 설계법입니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가열식 온실 기술입니다.

유럽보다 약 170년이 앞서간 것입니다.

과학 역사가들이 인정한 사실입니다.

동절기에 야채를 재배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일 년 내내

신선한 채소를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이 책에는 229가지의 술 빚는 법과

식품 보관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 식문화의 뿌리를 정립한 것입니다.

3. 식료찬요(食療纂要): 식이요법의 창시

그의 의학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음식으로 고치지 못하는 병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

이 철학 아래 일상적인 음식으로 병을 다스리는 법을 정리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식이요법 전문서입니다.

현대 의학이 강조하는 ‘푸드 테라피’의 원조입니다.

500년 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제8부. 두 갈래 길의 역사적 의미

전씨(훈구파) vs 정선 전씨(사림파)

이제 우리는 이해합니다.

왜 전씨 가문이 위대한지를.

천안 전씨가 격변하는 권력의 흐름을 읽고

‘현실 정치의 승리자’가 되었다면,

같은 핏줄인 정선 전씨는 전혀

다른 명분의 길을 걸었습니다.

낙향과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선 전씨의 선조들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고려 멸망과 단종 폐위 같은 격변기마다

벼슬을 버리고 깊은 산천으로 은거했습니다.

거칠현 7현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고려의 관복을 입고 산에 올라

옛 수도 개성을 바라보며 통곡했습니다.

이것이 정선 전씨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입니다.

사림파(士林派)로의 화려한 부활

하지만 세월이 흘렀습니다.

권력을 쥔 훈구파가 점차 부패해갔습니다.

전씨의 후손들이 세조 이후

세월 속에서 권력을 누리며 변질되어 갔을겁니다.

(아직 그 당시의 전씨는 조사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지방에 낙향한 정선 전씨 후손들은

성리학적 도덕과 학문을 갈고닦았습니다.

동안 공부하고 수양했습니다.

조선 중기가 되었습니다.

도덕적 명분과 실력을 갖춘

‘사림파(士林派)’가

중앙 정계를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선 전씨는 이 흐름의 중심에 서서 가문을 다시 크게 일으켰습니다.

역사는 다시 돌았습니다.

당장의 이익을 택한 훈구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명분을 지킨 사림파는

역사의 정의를 구현했습니다.

전팽희는 사림파의 종조(宗祖)로 추앙받는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

연산군 대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 당시,

스승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루되어 유배를 가거나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암흑기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 성종의 후궁 출신으로

전씨 왕비가 된 제헌왕후 전씨는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 두 아들이

어둠 속의 매질로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안양군과 봉안군은 거제도와 이천으로

유배를 보내고 사약을 내려 죽게 만들었습니다.

아쉽게도 죽을 당시 26세, 24세였고

부인 구씨(능성 구씨), 부인 조씨(평양 조씨)가 있었으나 양쪽다 자녀가 없어서 대는 끊어졌으나

성종의 아들이 입양되어 제사를 이어줍니다.

안양군(이항)의 양자: 이군(李君, 광천군)

봉안군(이봉)의 양자: 이희(李禧, 흥남군)

온전전씨의 자부심:

한 핏줄이 일궈낸 찬란한 유산

우리는 조선의 기틀을 세운

원종공신의 영광과,

권력 앞에서도 꼿꼿했던

사림의 절개를 동시에 품은

전씨 후손입니다.

가문이 걸어온 이

두 갈래 길은 결코 남이 아닌,

우리 전씨가 온몸으로 겪어낸

하나의 역사입니다.

이 숭고한 정신은 조선 말기,

녹두장군 전봉준에 이르러

민주주의라는 더 큰 강물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꿈꿨던

동학인들의 평등한 세상의 기록은

이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전 세계가 기억하는

인류의 보물로 거듭났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유네스코 등재:

2023년 5월, 인권과 평등,

민주주의의 뿌리가 된

‘신선한 민주주의 실험’으로 인정받아 최종 등재

나아가 우리가 소중히 지켜온 전씨 족보 또한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향한 걸음을 내딛으며,

우리 가문의 기록이 곧 세계의 기록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모두 가진 전씨의 후손입니다.

전씨는 한 핏줄에서 나왔으며

모두 한 가족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온전 전씨의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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